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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의 입장 === > '''우리는 독일과의 관계에서는 자유를 잃어버릴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소련과 붙으면 영혼을 잃어버릴 것이다.''' >---- >[[https://ko.wikipedia.org/wiki/에드바르트_리츠시미그위|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폴란드군 총사령관)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는 리트비노프가 구상한 집단 안보 체제에[* [[소련]]과 [[체코슬로바키아]]는 [[나치 독일]]에 대항해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하였고, 리트비노프는 여기에 폴란드도 참여시킬 생각이었다.] 협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폴란드는 [[독일]] 못지않게 [[러시아]] 및 [[소련]]과 역사적인 여러 악연이 있었으며, 영토 할양을 요구하는 [[나치 독일]]에게 강경한 것과 마찬가지로 집단 안보에 참여하라는 소련의 요청도 거절했다. 소련은 유사시에 붉은 군대가 독일로 진군할 수 있도록 [[동유럽]] 국가, 특히 폴란드(영-불의 동맹국)가 소련군에 군사 통행권을 내줄 것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그러나 폴란드는 소련에게 국경을 열어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기에 영국과 프랑스에게 "소련과 군사협정을 맺지 않았으며 맺을 생각도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하였고, 영불 양국의 설득에도 요지부동이었다. 폴란드가 소련과 대독 방위조약을 거절한 배경에는 역사적인 원한이 있었다. 폴란드는 1648년 일어났던 [[대홍수(역사)|대홍수]]에서 이미 [[스웨덴 제국|스웨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1618년부터 프로이센 공작이었는데, [[프로이센 공국]]은 태생부터가 [[폴란드 왕국]]의 봉신국이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는 [[칼 10세 구스타브]]와 손잡고 연방을 공격했고, 스웨덴이 수세에 몰리자 벨라우-브롬베르크 조약을 연달아 체결하여 프로이센 공국에 대한 폴란드의 종주권을 청산했다.], [[루스 차르국]] 등에게 영토를 뭉텅 뜯기면서 동유럽의 맹주 위치를 빼앗겼고, 1772년, 1793년, 1795년 [[프로이센 왕국|프로이센]]-[[러시아 제국|러시아]]-[[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 3국에 의해 [[폴란드 분할|영토가 3번이나 강제 분할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이때 러시아는 3국 중 가장 가혹한 통치를 펼쳤다. 특히 러시아 제국은 두 차례의 봉기를 경험한 이후 폴란드 민족주의를 더욱 혹독히 탄압하기 시작했고, [[동군연합]] 형태로 명목상으로나마 존재해오던 [[폴란드 입헌왕국]]을 폐지시키고 [[프리비슬린스키|프리비슬린스키 지방]]이라는 일개 지방으로 격하시켰다. 이 시기 수많은 폴란드 지식인들은 민족주의 운동을 벌였다는 이유로 투옥되거나 해외로 망명해야 했고, 폴란드 학생들은 학교에서 [[폴란드어]] 대신 [[러시아어]]로 말해야 하는 등 [[민족말살정책|민족 말살]]에 가까운 탄압을 겪어야 했다. 여기에 폴란드는 [[러시아 혁명]] 중인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소비에트 러시아와 직접적으로 전쟁을 치르면서]] 수도인 [[바르샤바]]까지 [[바르샤바 전투(1920년)|함락될 뻔한 적]]이 있었다. 따라서 폴란드 입장에서는 소련이 폴란드를 지원할 경우 폴란드 내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증대되는 건 당연하고, 심하면 이전 전쟁으로 얻은 동부 영토까지 잃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폴란드가 전간기에 획득한 동방영토였던 크레시(Kresy)는 기초적인 산업조차 없는 낙후한 땅이었기에 이득은 거의 없었고 완충지대로서의 의미가 더 강했다.] 이렇게 소련과 역사적인 악연이 있기는 했지만, [[뮌헨 협정]] 이후 폴란드에 대한 나치 독일의 압력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기 때문에 폴란드는 어떻게든지 안보 전략을 재고할 필요성은 있었다. 하지만 전통적인 우방인 [[프랑스]]는 폴란드의 생각과는 달리 1차 대전 때 엄청난 피해를 보았기 때문에 독일과 충돌을 야기할 수 있는 군사적 압력을 가하는 데 매우 소극적이었다. 또한 [[아돌프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를 폐기한 이후에도 적극적으로 제지하기는커녕 독일의 공세적인 군비 확장에 미온적인 대응을 할 뿐이었다. 폴란드가 믿고 있었던 또 다른 나라였던 [[영국]] 또한 [[대공황]]에 대한 후유증이 극심해 독일의 팽창주의적인 도발에 기껏해야 외무성 성명이나 발표하는 정도였다. 폴란드-독일 전쟁이 발발했을 때, 영국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독일에 대한 해상 봉쇄가 전부였다. 이런 폴란드의 실책을 서방에서는 전간기의 외교 실패 중 하나로 본다.[* [[http://countrystudies.us/poland/14.htm|(출처)]] 이 사이트의 해당 내용은 미국 의회 도서관의 출판부에서 펴낸 책(Glenn E. Curtis, ed. Poland: A Country Study. Washington: GPO for the Library of Congress, 1992)에서 발췌한 것이다. 여기 실린 내용은 소련을 악마화하던 냉전 시대에조차 당시 폴란드 제2공화국의 대외 정책은 강대국 사이에 낀 약소국이 취한 외교 실패의 대표적인 예로 언급될 정도이다.] 그나마 독소 양쪽 모두 계속 적대시하면서 폴란드 중심으로 다른 중, 동유럽 국가들을 끌어들여 [[중부유럽]] 일대를 제3세력으로 일으킨다는 선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시절 외교 정책도 당장 [[폴란드-리투아니아|폴리투]] 재건이라는 비현실적인 면모뿐만 아니라, 뮌헨 분할 참여를 비롯해 막상 폴란드 자체도 민족 영토 분쟁이 걸렸을 때마다 다른 동유럽 이웃 국가들과 마찰을 빚으면서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 잠잠해진 지 오래였다. 폴란드는 독립 영웅 피우수트스키의 지도 아래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했는데, 그는 과거에 사회주의자였으나 후에 [[우파]]로 전향하였고 독립 후에는 1925년 쿠데타를 일으켜 권위주의적인 독재 체제를 수립했다. 그는 [[발트해]](발트 3국)로부터 [[흑해]]([[우크라이나]])에 이르는 거대한 연방을 구성하고 폴란드가 그 맹주가 되어 서로는 독일, 동으로는 소련(러시아)와 맞서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미엥지모제(Międzymorze)[* "바다에서 바다까지"라는 뜻이다.]라고 부르는 이 정책은 사실상 실체적인 의미는 없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폴란드-루마니아-헝가리 간의 삼국동맹이 진지하게 논의된 정도였으나 이마저도 루마니아와 헝가리 간의 [[트란실바니아]] 문제로 인하여 무너졌다. 피우수트스키 사후 1936년부터는 [[https://en.wikipedia.org/wiki/Pi%C5%82sudski%27s_colonels|피우수트스키의 대령단]]이라고 불린 피우수트스키 휘하 대령들이 정권을 잡고 일종의 선군정치를 폈다. 비록 강력한 군사독재자는 없었지만 군부가 사회의 모든 면을 지배하는 일종의 군국주의적인 국가가 된 것이다. 그나마 피우수트스키는 [[정치현실주의]]자였기 때문에 소련과 독일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면서도 양국을 자극하는 일은 극히 피했다. 양국과 불가침조약 (소련과 1932년, 독일과 1934년)을 맺었지만, 그의 후계자들인 군부 지도자들은 대외 정책에 있어 현실적 고려 없이 점점 더 강경한 정책을 폈다. 게다가 폴란드는 뮌헨 협정에 한몫 끼기도 하여 헝가리와 함께 자그마한 체코 영토를 얻기도 했다. 이 당시 폴란드의 외무장관은 군 출신 대령단의 일원인 유제프 베츠크(1894~1944)였는데, 베츠크는 소련-폴란드-영불과 연합하여 독일에 맞서려는 리트비노프 구상을 거부했다. 베츠크는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엄정 중립을 강조하는 한편, 폴란드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및 폴란드와 비슷한 동유럽 국가들인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루마니아의 5국 동맹을 맺고 소련과 독일에 대항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헝가리와 루마니아는 사이가 매우 나빴기 때문에 같은 동맹에 끌어들이는 것이 어려웠고, 이탈리아, 헝가리는 뮌헨 협정 이후 나치 독일에 더 가까워졌다. 유고슬라비아는 세르비아가 주도하는 연방 구조가 허술하여 대외 동맹은커녕 연방 분열을 더 염려하는 지경이었다. 게다가 헝가리, 루마니아는 유고슬라비아를 분열시켜 자신들의 영토를 늘리고 싶어했을 정도로 동상이몽을 꾸고 있었으니 폴란드의 실패는 예정되어 있었다. 결국 5국 동맹은 뮌헨 협정 이후에는 그나마 독일을 견제할 수 있는 이탈리아가 독일 편으로 돌아서면서 거의 불가능해진 것이다. 나머지 4개국은 서로 사이도 나빴지만 동맹을 맺었다 한들 현실적 국력으로는 독일이나 소련과 대결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결과적으로 헝가리, 루마니아는 폴란드가 패망한 다음에 독일에 붙어버렸다.] 이처럼 폴란드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면 폴란드가 소련과 방위조약에 회의적이었던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폴란드는 점점 자국이 군사, 외교적으로 불리해지는 상황에서 주변 국가들을 잠재적 적국으로 돌리는 외교적 악수를 두었고, 결국 [[독소 폴란드 점령|자유와 영혼을 모두 강탈당하는 결과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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